디지털 화폐 시장, 금융권의 새로운 전쟁터
주요 금융회사들이 디지털 자산 시장 대응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신한금융을 비롯해 KB금융, 토스, 기업은행, 부산은행, 대구은행 등이 참여한 비공개 모임이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30여 명의 임직원이 모인 이날 회의에서는 원화 기반 디지털 화폐의 법제화와 시장 변화에 대한 대응 전략이 주요 안건으로 다뤄졌습니다. 토스 관계자와 법률 전문가가 강연을 진행했으며, 이후 참석자들은 향후 협력 방안을 자유롭게 논의했습니다.
당초 여러 회사가 함께하는 공식 협약 체결 가능성도 언급됐으나, 선거 이후 정책 방향을 좀 더 지켜본 뒤 결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나금융의 빠른 움직임이 촉발
금융계에서는 이번 모임이 하나금융의 최근 행보와 관련이 깊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금융은 국내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 운영사인 두나무의 지분 6.55%를 인수하겠다고 밝혔으며, 원화 디지털 화폐 유통을 위한 협력체 구축도 추진 중입니다.
디지털 화폐 시장의 경쟁 구도가 단순 발행을 넘어 거래소, 증권사, 빅테크 기업, 결제망을 아우르는 종합 금융 생태계 경쟁으로 확대되면서, 다른 금융사들도 개별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하나금융을 중심으로 한 협력 구도가 예상보다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 다른 은행들의 위기감을 키웠다는 분석입니다. 하나금융이 두나무와 손잡은 데 이어 네이버 같은 플랫폼 기업과의 연결 가능성까지 부각되면서, 실제 이용자 기반과 유통 채널, 결제 접점이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금융계 관계자는 "원화 디지털 화폐 시장이 열리면 발행 주체의 신뢰도만큼이나 플랫폼과 거래소, 결제망을 누가 확보하느냐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네이버 변수와 배달 앱 경쟁
네이버의 움직임도 은행들의 대응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하나와 협력 중인 네이버가 해외 기업과 함께 주요 배달 앱 인수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자체 배달 앱을 운영하는 신한금융 역시 관련 협력 경쟁에 적극 대응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해석입니다.
금융계 고위 관계자는 "하나금융이 두나무와 네이버를 잇는 협력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 다른 대형 금융그룹이 이 축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은행계에서는 하나금융과 나머지 은행이 맞서는 구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증권사들의 거래소 지분 확보 경쟁
증권사들이 가상화폐 거래소 지분 확보 경쟁에 나선 점도 은행들의 공동 논의를 앞당긴 요인으로 꼽힙니다.
삼성증권은 지난달 삼성 계열사들과 함께 두나무 지분 4%를 6천억 원이 넘는 금액에 취득했습니다. 이로써 하나금융, 한화투자증권에 이어 삼성증권도 두나무 주주로 합류했습니다. 기존 주주인 한화투자증권도 최근 보유 지분을 5.94%에서 9.84%로 늘렸습니다.
투자 대상은 두나무에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달 글로벌 가상화폐 거래소와 함께 국내 3위 거래소에 대한 전략적 지분 투자 계약을 맺었으며, 약 20% 지분을 확보하게 됐습니다. 미래에셋그룹도 비금융 계열사를 통해 국내 4위 거래소 지분 92%를 인수하며 새 대주주로 올라섰습니다.
증권사들이 거래소 지분 확보에 속도를 내는 것은 디지털 증권과 실물 연계 자산, 원화 디지털 화폐 등이 제도권으로 편입될수록 금융투자업과 가상화폐 거래소의 경계가 옅어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20~40대 투자자들이 거래소를 주요 투자 플랫폼으로 활용하고 있는 만큼, 증권사 입장에서는 젊은 고객층과 신규 상품 유통 채널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카카오와 주요 은행들의 행보
은행권에서는 카카오의 행보도 변수로 보고 있습니다. 카카오는 압도적인 이용자 접점을 갖춘 메신저 서비스와 함께 카카오뱅크, 카카오페이 등 금융 계열사도 보유하고 있어, 향후 원화 디지털 화폐 시장에서 시중 은행들의 주요 협력 후보로 거론됩니다.
기업 거래 기반이 강한 우리은행과 전국 영업망을 갖춘 농협은행의 움직임에도 관심이 쏠립니다. 은행권 관계자는 "당초 간담회에 우리은행과 농협은행도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그렇다고 향후 사업 협력 가능성까지 닫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업계의 우려: 여전히 신중한 금융권
다만 가상화폐 업계에서는 국내 금융사들의 움직임이 여전히 신중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주요국과 비교하면 법제화 논의 속도가 더디고, 은행들도 금융 당국의 기류를 살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해외 업체들 사이에서도 한국은 홍콩이나 일본과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금융계의 디지털 화폐 열풍이 나타나면서 협의체 구성과 협약 체결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정작 블록체인 업계와 함께 실제 서비스를 설계하거나 기술 인프라를 구축하는 단계까지 간 사례는 많지 않다"고 말했습니다.